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오 12세 (문단 편집) === 히틀러에 의한 납치미수 의혹설 === 전쟁 말엽 [[히틀러]]가 그를 납치하려고 한 적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이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때부터 나온 이야기이다. 납치뿐만 아니라 아예 바티칸으로 쳐들어가서 바티칸을 불태우고 교황을 [[성 베드로 광장]]에 끌어내 총살시키려 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치아노의 일기나 당시 회의록을 보면 [[이탈리아]]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 때문에 화가 나서 말로만 그랬고, 부하들조차도 위험하다고 만류할 정도였다.[* 물론 케셀링이 신속하게 로마를 비롯한 중, 북부의 이태리군을 장악하고 연합군에 대해 방어전을 펼친 것도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로마를 포기하고 이태리의 북부의 산맥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생각하기도 했다.] 만약 히틀러가 진짜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는 빼도박도 못하고 전세계의 가톨릭 신자를 적으로 돌렸을것이다. 나치는 바티칸을 포위만 했을 뿐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교황청의 끄나풀이 어디까지 뻗어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교황청과 돌이킬 수 없이 척을 지지 말고 적당히 구슬러 이용하는 쪽이 낫기 때문이었다.[* 히틀러의 입장에서도, 지나친 나치의 괴뢰로서 가톨릭 신도들조차도 등을 돌리는 교황보다는, 이런저런 저항을 하더라도 자기 할 말을 하는 교황이 있는 편이, 독일 국내의 가톨릭 정치 세력을 다독이기에는 더 나았다.] [[헤르만 괴링]]도 반대론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교황청은 나치가 교황청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3국으로 교황청을 옮기려 한 적이 했다. 하지만 비오 12세가 자신은 로마 주교이므로[* [[교황]]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교황은 전 주교단의 수장인 동시에 로마 교구의 [[주교]]이다.] 로마에서 죽겠다며 바티칸에 남기를 고집하자 추기경들도 더러는 감동과 충성심으로, 더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바티칸에 남았다. 비오 12세는 "나는 끝까지 로마를 지키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원하면 떠나도 좋다"라고 말했지만 추기경 누구도 '교황 버리고 도망간 추기경'이라고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역사에 영원한 [[오명]]으로 새겨지기는 싫었던 듯 모두 바티칸에 남았다. 이후 비오 12세는 나치 기갑 사단이 교황청을 포위하자 교황은 근위병들과 나치군 사이 교전이 일어나면 근위병들이 전멸하리라 예상, 총포류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한다. 근위대가 아무리 정예부대라고 해도 겨우 수백 명의 병력으로 나치의 대군과 정면으로 교전하면 전멸한다는 건 불보듯 뻔하기 때문. 그래서 포위 당시 근위병들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나치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창(무기)|창]]을 들고 순찰을 돌고 경계를 섰다.[* 그런데 [[플래툰(잡지)|플래툰]]의 기사에 의하면 스위스 근위병들이 회색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기관총]]과 [[박격포]]를 꺼내 들고 독일군과 대치했다고도 한다. 정말 창만 들고 다닌 것은 일부 근무자들뿐일 수도 있고, 저 대치 이후에 교황이 무장해제령을 내린 것일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인을 요함.] [[2016년]],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가 [[슈츠슈타펠]]이 비오 12세를 납치하려 했다고 보도했는데, 여러 차례 기사화되었던 다른 언론들의 보도와 달리 이번 기사에서는 비오 12세가 이 위협으로부터 피하는 과정을 새롭게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60708140103955|보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